조선을 위해 헌신했던 서서평을 기억해주세요!

반디님의 문제제기
1910년, 조선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 수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의료 시설 역시 열악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열정적으로 돕고 죽을 때까지 조선의 의료와 교육에 헌신했던 서서평이란 인물을 기억해 주세요.
서서평의 본명은 독일계 미국인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으로 그녀는 1880년 9월 26일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어머니가 계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성마가병원의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낮엔 간호사로 일하고 밤에 신학교를 다니다 그녀는 조선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1912년 2월 20일 서서평은 조선에 도착하였고, 1934년 생을 다할 때까지 조선을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1912년 한국에 파송된 서서평은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19년 3·1 운동으로 부상당한 조선인들을 치료해주고 독립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서울에서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전라남도 광주에 내려와 제중원에서 의료 활동과 여성들의 교육 및 인권 보호를 위해 전력으로 임했습니다. 1922년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인 이일성경학교를 설립하였고, 한국의 여인들에게 성서읽기와 초등학교 준비과정에 해당하는 글자를 쓰고 읽는 정도의 것을 가르쳤습니다. 나아가 부인조력회, 조선간호부회, 여전도회연합회 등을 설립하여 여성의 교육과 권리 보호를 위해 앞장섰습니다.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 아들 1명 등 14명의 한국 아이들을 입양해 그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오갈 곳 없는 과부 38명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조선의 의료 활동을 돕고 조선인의 자립과 교육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활동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평생 가난한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한 그는 영양실조에 걸려 5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임종 시 그가 남긴 소유물은 낡은 담요 반장과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이 전부였습니다. 사후 자신의 시신마저도 의학용으로 기증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떠났습니다. 1934년 7월 7일 그녀의 장례식은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진행되었으며, 이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습니다.

그녀는 본명이 아닌 서서평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조선인에게 다가갔습니다. 서서평의 뜻은 ‘천천히, 평온하게’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광주 남구 양림동 선교사 묘지석 사진 속에서 그녀는 검은 치마와 흰 저고리를 입은 채 아이를 안고 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선교사가 아닌 조선인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을 진심으로 도운 진정한 의료인이자 교육자였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그녀의 모토를 기억하고 꾸준히 다음 세대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자료:
차성환. (2014). 근대적인 전문 사회사업의 선구자 서서평. 담론201, 17(4), 29-57.
https://www.yna.co.kr/view/AKR20200918040000371?input=1195m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80534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700198&cid=71262&categoryId=71330
https://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53232
https://en.seoul.co.kr/news/entertainment/movieN/2015/04/10/20150410029028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70305.99002002717
반디님의 문제 제기
?명이 공감하고 있어요!

공감버튼 누르고 몇명이
공감했는지 확인해보세요!